[프랑스 영화]장교와 스파이(J'accuse,An Officer and a Spy,2019)
오늘은 프랑스 영화 장교와 스파이(J'accuse,An Officer and a Spy)에 대해 글을 적어 보겠습니다.
해당 영화는 Affaire Dreyfus,Dreyfus affair 즉 드레퓌스 사건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Dreyfus affair) 이라는 것은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이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서 유대인 혈통의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1859~1935)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우면서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극심한 정치,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며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입니다. 사건은 1871년의 보물전쟁에서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보물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의 여론은 안 좋아지게 되고 여기서 누군가는 패배를 책임을 져야 했고 이때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려고 혈안이 된 상황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 행위에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고 프랑스 사회에 다시 한번 쇼비니즘의 바람이 불어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4년 9월 신원 불명의 발신인이 보낸 편지 안에는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에 해당하는 한 장의 명세서가 들어 있었으며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Maximilian von Schwartzkoppen) 육군 대령 프랑스군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하게 되고 여기서 프랑스군 정보국은 조사 끝에 알자스 출신 유대인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육군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을 졸업하고 수습참모로 근무하던 촉망받는 프랑스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을 하게 되고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건물에서 재판이 시작되고 드레퓌스는 자신이 권한으로는 명세서에 언급된 마다가스카르 원정과 120mm 포와 그 지원부대에 대한 정보를 접근이 불가하다고 하지만 갑자기 드레퓌스의 동료가 모두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한편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의 필적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그가 명세서를 쓸 때 남의 필적으로 가장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란 희한한 논리로 결국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Île du Diable)으로 유배됩니다. 해당 악마섬은 영화 빠삐용을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섬으로 유배를 가기 전에 드레퓌스 대위는 전 포병연대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연병장에서 예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다른 장교가 예도를 빼앗아 부러뜨리고 계급장과 훈장, 단추 등을 군복에서 떼어내는 굴욕적인 강등식을 공개적으로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고 여기서 시간이 2년이 흐르고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마리조르주 피카르(Marie-Georges Picquart) 중령이 우연히 당시의 사건의 문건을 열람하고,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근거가 없다는 것과, 정보국에서 방첩대 실무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헝가리인 혈통의 페르디낭 발생 에스테라지(Ferdinand Walsin Esterhazy) 육군 소령의 문체가 명세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즉 간첩 잡는 게 임무인 방첩 장교가 조국 프랑스를 배신 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조사를 하게 되고
여기서 군의 압력 그리고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하게 되면서 프랑스 사회는 분열과 갈등 그리고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로 선고를 받고 소령으로 진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이후로는 프랑스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입김이 작용하게 되고 프랑스 극우 세력들은 강력한 유대인 비밀조직이 드레퓌스를 후원했기 때문에 드레퓌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여겨 프랑스 사회에 암약하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발본색원해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이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패전하고 프랑스 극우파는 비시 프랑스 수립에 적극 가담을 하게 되면서 프랑스 유대인의 색출과 학살에 협조했으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42년의 벨디브 사건이며 반면 에스테라지는 판결이 나왔을 땐 이미 변장 후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영국으로 도주한 후였으며 1932년까지 반유대주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의 삶을 살며 편안하게 죽었으며 1906년 당시 대법원에 의해 드레퓌스가 복권되기는 했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법원에서 무죄라고 했으니 무죄 취급을 할 뿐이라고 주장했고 1995년 9월 12일 자 리베라시옹 에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10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 육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선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프랑스 군사(軍史) 담당이었던 육군의 장루이 무뤼(Jean-Louis Mourrut) 장군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논란이 거의 100년 만에 끝이 났던 사건입니다.
인종 차별을 할 때 XXX는 죽어라. 라는 표현은 시간이 지나도 혐오 표현에 잘 사용이 되는 것 같고 그리고 독일 무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은 1917년 죽기 직전에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디애나폴리스 침몰 사건,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들을 보면 국가가 개인에게 죄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가 뒤늦게 진상이 밝혀진 사건이 많은 것 같습니다.